오막이야, 고막친구가 고막남친이 되는 바람에 거짓부렁이 되어 버린 고막사람의 취지도 되찾을 겸, 최근에 친
051_개구리에 미친 자 + 몽환 + 결정 등등. 한아임 to 오막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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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막아,
알다시피 나는 요즘 개구리에 미쳤다. 개구리의 실질적인 신체 구조라든지 생활 패턴이라든지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고, 귀여운 비주얼을 뿜는 개념으로서의 개구리에 꽂혔다. 그래서... 라기보다는, 개구리랑은 별로 직접적인 상관은 없지만, 왠지 ‘개구리’ 하면 ‘물’이 떠오르고, ‘물’ 하면 ‘몽환’이 떠오르니까 이번 편지에서는 몽환 컨셉에 걸쳐진 노래로다가 몇 곡 풀어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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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의 개구리는 종에 따라서 귀엽기도 하고 징그럽기도 한 것 같다. 이를테면, 얼마 전에 ‘개구리 왕눈이’를 찾아서 시청했는데, 거기에 나오는 왕눈이는 청개구리고 아롬이는 참개구리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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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내에서는 청개구리인 왕눈이를 무시하는 대사들이 나온다. “촌뜨기 청개구리 주제에!” 뭐 이런 류의 대사였던 것 같은데, 막상 청개구리를 검색해 보면 제법 귀여운 반면, 참개구리는 그냥 봐도 험하게 생겼다.
그런데 청개구리보다도 참개구리보다도 귀여운 건 남부 캘리포니아의 미니 개구리들이다. 여기가 열대지방은 아니지만 그래도 더운 편에 속하는 가운데, 해변을 따라서는 제법 촉촉하기도 해서 그런지, 열대스러운 미니 개구리들을 본 적이 몇 번 있었다. 평상시에 그냥 돌아다닐 때 볼 수는 없고 (낮에는 햇빛이 강하기 때문에), 비가 여러 날에 거쳐 연달아 올 때면 얘네가 하수관 같은 데를 통해 돌아다니는 것 같다. 빗물 빠지라고 설치한 관들을 통해 이동하는 건데, 너의 손보다 작은 내 손보다도 작은 어떤 손에도 한주먹에 들어갈 정도로 자그마한 개구리들이다.
색상도 다양하다. 초록스러우면서도 하늘색에 가까운 애들도 있고, 주황스러운 애들도 있고… 우리 집 앞 벽에 두 마리가 붙어 있는 걸 본 적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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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n I Trust - Serenade of W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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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막상 이런 애들을 직접 목격하면 가까이 다가가진 않는다. 얘네는 눈을 보고 뭘 생각하는지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눈을 보고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동물의 한 예는 까마귀다. 눈을 보고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동물의 또 다른 예는 비둘기다.) 이 미니 개구리가 그냥 벽에 그대로 붙어 있을 건지, 점프를 할 건지, 한다면 나를 향해 할지 저쪽으로 할지, 그걸 알 수가 없다.
게다가 그냥 나를 향해 점프하기만 한다면 다행인데, 만약 집으로 점프한다면? 집 안으로? 그러면 얘를 어떻게 잡지!!!!
그래서 그때 집 앞의 개구리를 봤을 때 그냥 문을 고이 다시 닫았던 것 같다. 제발 다음에 문을 열 때는 어디 저기 딴 데로 가 있기를 바라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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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anie Martinez - Cry ba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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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개구리에 대한 나의 관심은 철저히 픽션적이라 할 수 있겠다. 개구리란 상징적으로 의미로운 동물이다. 부귀영화, 평화, 변화, 다산, 치유 등등이 있는데, 이집트며, 아메리카 대륙 곳곳이며, 동양이며, 다양한 장소들에서 대개 '좋은' 상징으로 해석되는 것 같다.
(한편, 중국 소설 중에 ‘개구리’란 것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을 무조건적인 존재주의—특히나 물질세계에서 태어나기만 하면 장땡이라는 존재주의—로 인한 트라우마 서사로 본다. 이 존재주의적 트라우마에 영향을 받는 개체는 인간뿐만 아니라 당 국가도 포함한다. 일단 존재하기만 하면 장땡이라고 여기는 개체가 타개체의 존재 혹은 부존재를 좌지우지하니까 생기는 트라우마라는 건데, 정확히 그 반대로 해석하는 경우도 많을 거라고 생각된다. '일단 인간은 존재하는 게 장땡'이라는 주의가 인간계 곳곳에 팽배해 있는 것 같아서다. 아마 '존재하지 않는 것도 옵션'이라고 말하면 자신의 존재가 자동적으로 흔들리는 느낌이 들어서가 아닐까 추측한다. 그런데 그런 걸로 흔들릴 존재면, 물질계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별로 안 존재하는 것일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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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개구리가 흥미로운 상징이란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요즘과 같은 관심은 우리가 개구리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이후에 추가적으로 생긴 관심이다. 사람이 무슨 동물을 닮았다고 하면 대개는 고양이상 강아지상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았단 말이지. 그런데 닮은 게 개구리였다니!!!! (개구리의 어디가 닮았는가? 내 생각에는 미간이 닮았다.) 나의 스피릿 애니멀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동물일까 했는데, 개구리였다니!!!
이런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있다는 것도 최근에 알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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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애니를 보지는 않았는데, 그림이 귀엽기 짝이 없다.
전반적으로 요즘에 애니를 많이 보고 있다. 전형적 소설식 서사와 전형적 애니식 서사, 나름의 양극단이 요즘 가장 좋다. 양극단이라 함은 촘촘함의 정도를 말하는데, 실사 오디오비주얼의 서사는 그사이 어딘가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고, 그 중간성이 요즘엔 답답하다. 언젠간 또 그 중간성이 좋아지는 때가 있겠지만서도.
전형적 소설과 전형적 애니의 크로스 같은, 말하자면 애니적 소설 서사도 있는데, 그것이 웹소설 같다. 템포가 빠르고, 에피소드도 문장도 짧고, 전반적으로 마음이 가볍고 접근이 간단하다. 글은 뭐든지 할 수 있는 매체라서 (그러하다고 하면 그러해지기가 가장 쉬운 매체가 아닌가? 폭탄이 있으라, 하면 예산을 더 들이지 않고도 폭탄이 있는 것이다.) 양극단에 있는, 혹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합체가 되는 건가 보다. 그리고 개구리란 양극단의 서사에 어울리는 동물 같다. 뭍에 있다가도 물에 들어갔다가도, 다리가 있다가도 없다가도 하며, 심지어 안타깝게도 전기 충격 실험(?)에 쓰이곤 하지 않는가? 나는 직접 해본 적은 없다만, 전기 충격을 주어서 죽은 개구리의 내장이 뛰는(?) 그런 걸 실험한다는 이미지를 나는 어디서 얻은 것이지? 그러니까, 개구리는 죽은 것 같아도 사실 안 죽은 것일 수도 있다는 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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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ppin (Tripped Out Soul Mix) - Kara Marn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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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한 것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걸 더 실천하면서 개구리에 더 관심이 가는 것 같기도 하다. 결정한 것을 이렇게 유지하는 것에는, 가장 첫 결정을 유지하기 위해 그다음에 온 결정들을 무너뜨리는 것도 포함된다. ‘가장 첫 결정’은 ‘꼭지점 결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고 ‘기저 결정’이라든지 ‘토대 결정’이라든지, 하여간에 뭔가 근본적이고 가장 포괄적인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물갈이의 시기다. '나'라는 어항에 들어 있는 물을 가는 건데, 어항이 팽창해도 물갈이는 필요하고, 신난다. (어항이 아무리 커져도 물이 그대로면 그냥 같은 어항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치 큰 바다에 둥둥 떠 다니는 좀 작은 어항에 물이 고여 있다가, 약간 더 큰 어항으로 옮겨 탄 것 같을 텐데, 어차피 큰 바다에 있으니까 어항이 좀 작든 크든... 그런 약간의 크기 차이로는 별변화가 없었을 거란 얘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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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을 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결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결정하지 않는 척하기로 하는 결정을 했을 뿐이다. 정말로 결정을 하지 않으려면 빈 페이지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말 그대로, 소설을 쓰려고 페이지를 펼쳐놓고서는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이 유일한 방법일 텐데, 그러면 소설 속 캐릭터는 아예 존재하지 않을 테니 결정을 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러나 존재하는 소설 속 캐릭터는 그저 존재함으로써 이미 결정을 한다. 그러려고 소설을 쓰고 쓰이는 거 아니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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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quilo - It All Comes Down to thi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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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아임 드리밍에서 하는 쌉소리를 오늘은 여기서 조금 좀 해봤다. 아임 드리밍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꼭지점 결정이란 것에 관련된 결과로서, 요즘에는 대본 없이 쏼라쏼라 하는 것을 연습 중이다.
즉, 꼭지점 결정을 ‘이루려고’ 무대본 녹음을 하는 게 아니고, 꼭지점 결정은 이미 완결되어 있으니까 무대본 녹음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알아서 들었다는 소리다.
이러한 원인과 결과의 뒤바뀜에는 엄청 큰 차이가 있고, 또 다른 엄청 큰 차이들을 계속해서 만들어 낸다. 이 차이들이 예전에 비해 저절로 펼쳐지는 삶을 만들고 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내가 (우리 개개인이) 뭘 원하면, 원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경중이 없다. 꼭지점이라고 부를 만한 포괄적인 욕망이라는 건 그냥 내가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 것이지, 사실 ‘초콜릿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는 욕망보다 더 어려울 것도 쉬울 것이 없다.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할 것도 없다. 만약 그러해 보인다면 (대체로는 ‘큰 결정’이라고 하면 어려워보이고 중요해 보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그건 내가 꼭지점과 나 사이에 두기로 결정한 다른 결정들 때문이다.
그런 다른 결정들이 물갈이하면서 내보낼 결정들이다. 꼭지점과 나 사이에 있어야만 한다고 망상했던 조건들은 차차 당연히 나가게 될 것이다. 걔네는 어항 밖에서 어항이 무엇인지 더 분명히 해주는 기능을 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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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기억하려고 결정한 것은—이거야말로 꼭지점 결정일 것 같은데—서사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정말이지, 나에게는 내 서사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까 말한 빈 페이지로 돌아가지 않는 한. 그런데 내가 페이지 안에서 살기로 한 이상 어떻게 빈 페이지로 돌아간단 말인가? 말이 되지 않으니, 나는 페이지에 사는 동안 페이지를 줠라 재미나게 누리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서사 바깥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서사 안의 모든 것은 다 내 서사다. 너무 당연하게 들리는데 당연해서 까먹을 때가 있다.
이게 ‘한바탕 꿈’의 의미라고 지금은 결정했다. 나는 이걸 기억할 때 가장 편안하니까 이게 맞나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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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막사람을 쓴 지 2년 하고도 1달이 되었다. 스티비에 이미지를 몇 장 첨부하려면 무려 돈을 내야 한다는 점이 나를 점점 더 답답하게 하고 있다. 몇 번은 이미지 첨부를 위해 여기다 돈을 냈지만, 이제는 돈을 낼 때 내더라도 스티비에는 내지 않을 계획이지 않니?
(중요한 기능 이상 하나만 더 말하자면, 브라우저에서 로그인할 때 곧바로 되지 않고 한 번씩 튕겨나가되, URL에 비밀번호가 뜨는 현상을 보고는 경악했었다. 이게 대체 무슨? 나는 웬만하면 내 데이터는 내가 갖고 있자는 주의인데, 이 정도면 보안이 걱정된다. 여기 있는 '내' 데이터가 과연 '내' 데이터인가? 여기다 우리 혹은 구독자들이 주요 개인 정보를 풀지 않기에 망정이지...)
고막사람의 정신을 킵하더라도, 꼭 지금 이 형태여야 할 이유는 없다 이 말이다. 특히나 이 형태를 이용하는 것 자체에 방해가 된다면 말이야. (뉴스레터를 쓰려고 하는데 기능 부재/이상으로 내용과 방향성을 조정해야 하는 이런 경우.)
하여간에 일단 그건 됐고! 나는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들 중 하고 싶은 것들을 하고 있다. 페이지란 비었든 안 비었든 알아서 잘 돌아간다고 결정한 걸 기억하려고 한다. 굳이 내가 서사를 어떻게 하려고 하지 않아도, 이미 쓴 것들로—앞서 한 결정들과 그중 취소한 결정들로—자기가 알아서 돌아간다. 고막사람의 정신을 어디다 키울지에 대한 결정도 기저 결정으로 인하여 알아서 펼쳐질 거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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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데에도 아무 때에도 있었던 적 없는 세상, 그리고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하는 세상 사이의 해석자다. 원래도 괴란하고 괴이하고 괴상하며 해석함 직하다고 여기는 것도 여러모로 괴하다. 이런 성향은 번역으로 나타날 때도 있고, 오리지널 스토리텔링으로 나타날 때도 있다. 이러나저러나 결과적으로는 어떤 형태로든 이야기를 하고 있다. 뭐 하고 사나, 뭘 쓰고 뭘 번역했나 궁금하면 여기로. https://hanaim.imaginariumkim.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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