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막아,

나는 이 편지의 이 부분을 엘에이로 돌아온 다음 날 쓰고 있다. 태준의 편지를 스케줄링한 직후다. 6월 중순이지.

나는 지금 뭔가 불안정하다. 아주 슬프거나 아주 비참한 그런 불안정함은 아니다. 아주 많이 그랬던 때는 이제 좀 지나간 것 같다. 그렇지만 하여간에 그래도 불안정하다.

시차 때문은 아니다. 너랑 떨어져 있는 건 아쉽지만, 엄밀히는 공간차 때문도 아니다. 그보다는, 막연하게 “지금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 아닌데” 하는, ‘잘못됐다’는 느낌 때문이다.

‘지금 여기’란 시간도 공간도 포함하지만, 시간과 공간만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지금 여기에 담긴 나의 총체적 상태를 짧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다.

“지금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 아닌데”라는 이 느낌은 새로운 느낌이 아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게 있어 왔다. 이것은 참으로 근본적이면서도 어떻게 만질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그런 느낌이다. 처음에는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사도 해보고, 이직도 해보고, 누구랑 헤어지고 누구를 만난다든지 하는 관계 재설정을 해보지만, 그걸 ‘잘’하면 잘할수록 깨닫게 되는 것이 있으니, 그야말로 그 녀석이 그 녀석이며, 그곳이 그곳이고, 따라서 그때는 그때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어서 다른 데로 다른 때로 가더라도, 내가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 아닌데”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주는 이유는, 내가 나인데 그 내가 잘못됐다는 느낌 때문이다. 바로 그 내가 뭔가 달라야 한다는 느낌 때문이다. 뭔가 더 잘났어야 한다든지, 뭘 더 했어야 한다든지, 하여간에 지금 여기의 내가 아닌 어떤 다른 버전의 나였어야 한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 느낌을 가지고 그 어떤 다른 지금 여기로 간다 한들, 소용이 없다. 그때 만나는 사람이 아닌 누구를 만나도, 소용이 없다.

다른 나이고 싶은 마음 그 자체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이를테면 ‘배가 고픈 나’가 ‘배가 부른 나’가 되고 싶은 마음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배가 고픈 나’가 ‘배가 부른 나’가 될 수 없다고 여기는 데서 발생한다(고 나는 요즘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배가 부른 내가 되고 싶다고 주장하면서도, 사실은 내가 배가 불러질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다. 더 광범위하게는, 나는 다른 내가 되고 싶다고 주장하면서도, 사실은 내가 달라질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근본적으로는, 아주 솔직해지자면, 달라지고 싶은데 달라질 수 없는 나와 사랑에 빠져 있다. 그러한 내가 너무 안타깝고 불쌍해서.

그나마 이러한 “지금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 아닌데”의 센티먼트가 많이 녹아 나가고 나서 너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여러 번 말했다시피, 만날 수 있는 가장 최적의 타이밍에, 최적의 장소에서 만난 것이다.

사실 오늘은 태준의 편지를 스케줄링하는 것에서 고막사람 작업을 그치려고 했다. 어제 엘에이로 돌아왔으니, 여러 가지 잡일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 같아서 그랬다. 그런데 태준의 편지를 읽으니까 고막사람이 격하게 쓰고 싶어지더군. 그것은 태준의 글에서 태준이 음악을 너무 좋아하는 것이 느껴져서일 수도 있고, 이번 방문 때 태준을 처음 만났기 때문에 태준을 생각하면 이틀 전까지만 해도 내가 물리적으로 존재했던 공간과 연결되는 느낌이 들어서일 수도 있고, 고막사람 자체가 편안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고막사람은 참 편안하다. 오막 때문에 편안한 것 외에도 편안하다. 이를테면, 태준에게 고막사람에 글을 써주지 않겠느냐고 물었을 때도 편안했고, 내가 글을 쓸 때도 편안하고, 오막이 글을 쓸 차례일 때도 편안하다.

지난 편지들에서도 몇 번 언급한 것 같은데, 이 편안함 만큼 요즘에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잘 없는 것 같다. 이 편안함은 아까 말한 “지금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 아닌데”와는 반대되는 느낌이다. 어느 정도로 편안한가 하면, 고막사람이라는 안전한 통 안에서 지금까지 해 온 편지쓰기 외의 다른 것을 해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편안함이다. 예를 들어, 오막이 사진을 찍어도 편한 건 “오막이 찍으니까”라는 이유가 크지만, 그걸 올리는 게 편한 건 고막사람에다가 올려서다. 나중에는 내 사진을 어디에 올려도 상관없는 내가 될 수도 있지만, 일단은 그렇다.

고막사람은 내가 벌인 일 중에 가장 아무 생각 없이 벌인 일 같은데, 이렇게 편안한 통 같은 것이 되어 버려서, 거기다가 뭘 집어넣는다고 생각하면 지금 여기서 내가 그럴 만하니까 그러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벌인 다른 일들도 대개는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한 일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어딘가에서 문득 확인해 보면 아주 생각을 많이 하고 있고, 그런 생각의 99%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런데 나는 지금 여기서 내가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내가 그러면 안 된다’에서 ‘그러면’이 뭔지는 상관이 없다), 그러한 생각에 사로잡힌 와중에도 사로잡혔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고 그 99%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생각을 붙잡고 그것을 ‘계획’하고 ‘실천’하려고 한다.

어떻게 하면 다시 돌아갈 수 있는가, 그저 편안한 상태로. 원래의, 아무 기대가 없어서 기대가 많은 상태로. 내가 그러한 상태일 때쯤 우리가 만난 것처럼, 그와 같은 상태에서 다른 것들을 만나 왔지 않나. 그리고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면 만난 것들을 유지할 수 있지 않나.

기대에 관련된 이 모순 같은 상태는 계획에 관련된 모순 같은 상태와 흡사하다. 가장 이상적인 상태는 아마 계획이 없어서 계획이 있는 상태일 것이다. 왜냐하면, 계획이 아주 촘촘하면 사실은 계획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 촘촘한 계획대로 될 확률이 0%에 가깝기 때문이다. 반면 계획이 없으면 계획이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가 된다. 계획없음 안에서 괜찮을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아침에 일어나기만 하면 알아서 하루가 흘러갈 것이라는 것을 안다는 건 계획이라면 계획이고 무계획이라면 무계획이다. 일단 아침에 일어났으니 그걸 계획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 외의 계획이 없으니 무계획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나는 어젯밤에 오늘 할 일의 계획을 세웠지만, 그중 고막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고막사람을 쓰고 있고, 지금이 이 글을 쓸 가장 완벽한 타이밍이다. 이걸 미룸으로써 계획대로 이걸 안 쓰고 다른 걸 쓴다 한들 내가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린단 말인가? “계획대로 됐다”는 이상한 만족감 외에 얻을 것이 무엇인가?

그렇다고 해서 전혀 아무 계획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여기진 않는다만. 왜냐하면 어제 대강 계획을 세울 땐 그것도 그것대로 좋았거든. 계획에서 얻는 즐거움 자체가 좋을 때도 있단 거지. 내가 아예 무계획으로 산다고 말한다면 그건 완전 거짓말이다. 나에게는 계획이 있다. 스케줄이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스케줄에 쫓기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특히 요즘엔 그러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안 쫓기려고 지금 같은 상태를 추구했었는데, 왜 지금까지도 더욱 지금 같지 못하고 아직도 다른 때 같으려고 하며, 여기 있지 못하고 아직도 다른 데에 있으려고 할까?

수사적 질문에 불과하다. 답은 매우 간단하다. “지금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 아닌데”에 중독되어서. 그게 너무 습관이 되어 있어서. 플러스, 사실은 벗어날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으니까. 꽤 녹여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직도 잔존한다.

쫓기는 느낌은 습관이다. 일을 다 ‘해결’하면 그만 쫓길 것 같지만, 일을 양적으로 웬만큼 해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해결할 일을 다 해결하고 나면, 더 많은 해결해야 할 일만 기다리고 있다. 왜? 내가 사랑에 빠진 건 계속해서 쫓기는 나니까.

따라서 저런 상태보다 훨씬 좋은 건 쫓기기에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하고 싶은 걸 하는 상태인 것인데, 그러한 나를 만들려고 지금 여기를 벗어나려고 하다 보면 그 자체가 쫓기는 형국이 되어서, 그냥 돌고 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면, 표면적으로는 만약 너와 나 사이의 시간차와 공간차가 없었다면 많은 문제가 해결되는 듯 보였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을 거다. 나한테 “지금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 아닌데”가 이만큼 남아 있는 한 그랬을 거다. 

이러한 느낌을 쫓기듯 전부 다 없애려고 하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겠지만, 다른 시점을 택함으로써 녹아 나가는 부분들이 확실히 있는 걸 보면, 근본적으로 다른 느낌 속에서 살 가능성이 있는 것 같긴 하다.

나는 이왕이면 너랑 그 느낌 속에서 살고 싶다. 내가 요만큼 자유로워져서 너한테 요만큼 더 자유를 줄 수 있었고, 그 요만큼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사귀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 나는 줠라 완전 대박 자유로워지고 싶다.

우리는 어마무시하게 잘 살 건가 보다.

결국에는 가만히 있음으로써 가만히 있어지지 않는 상태를 만날 때 가장 기쁜 것 같다. 편안한 상태. 편안한 상태에서는 굳이 뭘 하려고 안 해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존나 편하기 때문이다. 이게 우리 친구들과도 이미 소소하게 겪은, “지금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 아닌데”라는 센티먼트가 무척 적거나 없다시피 한 그 상태다.

존나 편한 사람은 절대 막무가내로 죽치고 늘어져서 아무것도 안 하지 않는다. 반드시 뭘 한다. 존나 편하면 온전히 나일 수 있는데, 그러한 내가 막무가내로 죽치고 늘어져서 아무것도 안 할 확률은…

난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편안한 상태에서 하고 싶은 게 없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

그래서 나는 어쩌다 보니 고막사람이 이렇게 편안한 것이 기쁘다. 지금 이 글과 같은 쌉소리를 여기다가 쓸 수 있는 것이다. 이 통을 확장하면 나는 ‘다른 일’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하면서도 좀 더 편안할까. 이런 통이면 뭘 넣어도 여전히 편안한 통이지 않을까. 그리고 여기에 여러 사람이 들어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하여간에 존나 편하기 때문이다.

leejean - Secondary Opinion

태준 & 오막이랑 곱창 대창을 먹던 날, 그대들이 둘 다 비스무리하게 한 얘기가 있었다. 사실 그대들은 영화 전공을 하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어찌저찌하다 보니 하게 됐다는 맥락. 그대들이 나온 대학을 가려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 어찌저찌하다 보니 가게 됐다는 맥락.

그런데 그렇게 어찌저찌 만나게 된 그대들은 십 년도 넘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친구다.

선우정아 - Classic

저번 글은 태준이 써 주었고, 앞으로 몇 달간 다른 친구들도 우리와 번갈아 가며 고막사람에 글을 써주기로 했다.

각 사람이 쓴 글은 문장 길이부터 문단 띄기까지, 제각각이다. 나는 이 점이 너무 좋다. 숨 쉬기만큼 글에서 성격이 드러나는 부분이 없는 것 같다. 내용보다 더욱 성격이 드러난다. 문장 길이, 문단 띄기, 쉼표의 유무도 그렇고, 어떤 질문에서는 물음표를 쓰되 다른 질문에서는 쓰지 않는 것, 말줄임표를 쓰는가 쓰지 않는가, 기타 등등이 제각각 다른 게 정상이다. 편안한 상태다. 숨 쉬는 패턴이 다른 것처럼. ‘잘 쓰려고’ 쓰는 거 말고, 그냥 원래 숨쉬던 대로 하는 게 정상이고 편안한 상태다. 어찌저찌 모여서 이것저것 같이 하다가 또 흩어지든 말든 일단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이 자신일 수 있는 통이다.

Sarah Kang - Dance With Me (feat. Cody Dear)

그런 어찌저찌한 사람들을 풀어놓을 시공간을 갖고 싶다. 보다 물리적인 통을. 모일 만한 때와 장소를. 지금 여기의 나한테는 그런 시공간이 없고, 그런 면에서 그러한 나는 ‘잘못됐다’고 느껴진다. 아까는 너랑 시간차와 공간차가 있는 게 그럴 만해서 그렇다고 말했지만, 그조차도, 니미럴 존나 잘못됐다...!!! 그럴 만한 거 알겠는데, 그래도 미친 잘못됐어...!!!

그리고 그 잘못됐다는 느낌을 해결하려고 일부러 행하는 99%의 것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배부를 수 없음을 사실은 너무나 굳게 믿는 나머지, 배고픈 나에게 배부름을 꿈꾸지 말라고 하는 거나 다름없는 행위들이라서.

정말로 내가 배부를 수 있음을 안다면, 그때 내가 행할 것들은 아주 편안한 것들일 것이다. 고막사람에 걸맞은 편안한 것들. 그것들이 과연 ‘어찌저찌한 사람들을 풀어놓을 시공간’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는데, 불편한 것들이 그러한 시공간까지 이어지지 않을 것은 확실하다. 물리적으로는 어떤 시공간이 생기는 것처럼 보여도, 그곳에서 불편할 것이라서 그렇다. 그러니까 어차피 불편할 걸 굳이 더 힘들여서 불편할 필요가 없는데…

엘에이로 돌아온 나는 이리로 돌아왔다고 막연하게 여겨지기만 하지, 어디로 돌아온 건지, 돌아간 건지 모르겠다.

작년까지 거의 평생을 내가 골몰했던 주제 중 하나가 ‘집 없음’이었는데, 네가 기억을 하는지 모르겠다.

태준이 보낸 음악을 듣고 나는 이동을 했는데, 그곳과 그때가 어딘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내가 뭘 몰라도 고막사람은 알아서 잘 굴러간다. 편안하게. 불안정한 나도 그 곁에서 어떻게든 굴러간다. 그걸 아는 나는 과연 어디까지 나를 편안하도록 내버려둘 수 있을까?

아임.